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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이우환
문화적으로 역량이 있는 대도시 미술관은 한두 개로는 역할을 다하기 어려워 분담한다. 장르로 구분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시기로 나뉜다. 프랑스 파리의 주요 미술관이 그러하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이 1848년을 기점으로, 또 다른 퐁피두 미술관은 1914년을 기점으로 오르세 미술관과 시대를 구분해서 전시된다. 독일 베를린도 마찬가지이다.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과 구 국립미술관은 시대별로 나뉘고,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으로 다시 세분된다.
함부르거 현대미술관(Hamburger Bhanhof)에서 반호프(Bahnhof 줄여서 Bhf.)는 기차역을 의미하는데, 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된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884년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1906년 교통-건축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단장하였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본격적인 복원은 베를린 도시 탄생 750주년을 맞아 국가 차원에서 진행돼 1996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기차역을 복원해서 전시장 외관도 내부도 독특하다. 열차 플랫폼이었던 큰 홀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연결된 여러 개의 전시관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을 찾았던 이유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달 28일까지 이어진 이우환 선생의 전시가 있어서다.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2010년엔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합작으로 일본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을 개관했고, 2015년에는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상설 공간이 마련됐다. 2022년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 이우환 미술관(Lee Ufan Arles)이 열렸다. 그리고 세계 미술계의 중심이 된 도시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회고전은 선생의 경력에 정점을 찍는 중요한 전시라고 생각했다. 2000년까지는 독일에서 자주 전시했으니, 독일이 선생을 세계로 나가게 뒷받침한 셈이다.
함부르거 반호프 초청 특별 회고전은 이우환 창작 인생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57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했다.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동풍, 조응, 관계항, 모놀로그 등 그의 작품은 사물이 배치된 공간과 나의 관계를 세워 주고, 이를 통해 세계를 열어 준다. 사물 그 자체보다는 전시된 사물이 외부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에도 많은 베를린 시민이 걸음 하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전시 말미인 지난달 18~20일은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한국인 지휘자 김은선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화제가 되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문화도시 베를린에서 음악과 미술, 우리 K예술이 활약하는 장면들에 가슴 뛰었던 시간이다.
2024-05-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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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고대도시 로마에서 만나는 미래건축 '맥시'
이탈리아 로마는 서구 유럽과 인류 문화의 중심이자 시작이다. 그런데 현대의 문화로 한정하면 다소 이야깃거리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는 로마의 너무나도 많은 문화유산과 유적과 같은 콘텐츠에 가려진 착시일 뿐 현재의 로마도 놀랍게 변화하고 있고, 그 중심에 국립21세기미술관, 맥시(MAXXI)가 있다.
맥시는 이탈리아어로 ‘Museo nazionale delle Arti del XXI secolo’, 즉 국립 21세기 미술관(National Museum of XXI Century Arts)이란 뜻의 약자로, 로마 플라미뇨 지구에 위치한 국립현대건축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이탈리아 문화유산부 산하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이라크 출생의 영국 국적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했다. 국내에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다.
맥시는 설계와 시공의 특수성 때문에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10년 완공되는데, 자하 하디드 디자인은 국제 공모전에 출품된 273개 디자인 가운데 당선된 작품이다. 당시 렘 콜하스, 장 누벨, 스티븐 홀과 같은 쟁쟁한 건축가를 물리치고 선정됐다. 또한 유럽 최고의 건축물에 수여하는 영국 왕립건축가협회(RIBA) 스털링 건축상을 수상했다.
맥시는 크게 미술관과 건축관 두 개의 건축물로 이루어진다. 내부는 오디토리움과 미디어 도서관, 서점, 카페 그리고 기획전시나 공연, 교육 등을 위한 갤러리가 포함됐다. 미술관 주변의 야외 중정은 대규모 예술작품 설치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으며, 현재는 니키 드 생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맥시 외관은 대로에서는 바로 눈에 띄지 않는다. 곡선으로 된 벽과 외관, 각 층은 서로 다른 층고를 가지고 변하고 있으며, 만나는 교차점마다 방문객은 다양한 경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이는 매우 다채로운 공간적, 기능적 구성을 제공한다. 또한 원래 부지로 쓰였던 육군 막사에 대한 지표성을 유지함으로써 도시적 맥락에 대한 접근도 고려됐다. 특수 지붕 시스템은 내부를 자연광과 조명을 조화롭게 가동해 편안한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맥시의 예술품 컬렉션은 최신 작품과 과거 경험 사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수집된 회화, 설치, 비디오 아트, 조각, 사진 등 400여 점으로 구성됐다. 시기적으로는 1960년대에서 2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탈리아와 해외 작가들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은 신예 작가들과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 컬렉션의 핵심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고대도시 로마의 수많은 유적 사이에서 특별하게 존재하는 이 미술관의 존재와도 맥을 같이 한다. 유니크함과 맥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2024-04-1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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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2차 대전 벙커가 미술관으로 변신, 잠룽 보로스
전 세계 주요 수집가의 미술관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관람객을 만나는 곳이 제법 된다. 스위스 루체른의 로젠가르트 컬렉션, 프랑스 파리의 피노 컬렉션, 미국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뉴욕의 프릭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독일 베를린의 잠룽 보로스도 그러하다. 독일어로 잠룽(Sammlung)은 컬렉션이란 뜻이다.
광고업계의 성공한 사업가인 크리스티안 보로스는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할 베를린의 역사적인 장소를 물색했고,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년 히틀러 명령으로 건축가 카를 보나츠가 설계한 벙커를 2003년 구입한다. 다른 벙커와 마찬가지로 전쟁 직후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가 이후 꽤 오랫동안 직물과 과일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였던 공간이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부터는 테크노 클럽으로 바뀌었다.
베를린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에 대비해 자국민을 대피시키기 위한 벙커가 곳곳에 남아 있다. 독일인에게 벙커는 참혹한 역사의 잔해이다. 벙커를 부수지 않고 보존하는 곳이 적지 않으며, 도심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벙커는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하고 있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곳이 베를린 미테 지역에 위치한 라이히스반 벙커이다.
보로스가 인수한 라이히스반 벙커는 그의 컬렉션을 담은 현대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건축가 캐스퍼 뮐런 니어에 의해 베를린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건물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 그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가 주는 위압감에 놀라게 되고, 내부로 들어가면 창 하나 없이 폐쇄적인 공간을 잇달아 만나게 되면서 긴장감마저 돈다. 하지만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 비디오, 사진 등 독립적인 공간마다 각기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긴장감은 이내 호기심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진입로가 사면으로 뚫려져 있어 똑같은 4개의 파사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입구가 어디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단 하나의 사인물도 건축물 외관에는 없다. 예약 시간이 되어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었기에 메인 파사드와 입구를 알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두 개의 철문으로 된 입구 중 하나는 거대한 돌로 막혀 있어, 무언가 역사적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있는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부산에도 200여 개의 근대건조물이 있고,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 건조물을 2010년부터는 근대건조물로 지정, 관리하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손이 미치지 못한 40여 곳은 이미 사라졌고, 시비로 매입해 운영하는 곳도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방치되기도 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2024-04-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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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공동주택의 반전, 야마모토 리켄의 '판교 하우징'
지난 5일(현지시간) 일본의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79)이 올해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일본은 1979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8회에 걸쳐 총 9명(2010년 수상자 ‘SANNA’는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 공동 수상)이 수상해 미국과 동률(8회)이 되었다.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 없다.
야마모토 리켄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뒤 그가 설계에 참여한 경기 성남시 ‘판교 하우징’(월든힐스 2단지 아파트)과 서울 ‘강남 하우징’(세곡동 보금자리주택 3단지)이 주목받고 있다. 국내 소재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건축을 탐방 중인 필자는 이번 주 판교 하우징을 다녀왔다.
방문에 앞서 월든힐스 2단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동주택이 위치한 분당구 산운마을을 검색했다. 그중 눈에 는 글이 하나 있었는데 ‘미분양 굴욕 10년 이후, 일본 건축가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 사연이었고, 이에 화답하고자 지난 2020년 1월 스태프 20명과 함께 건축가가 2박 3일 내한했다는 기사였다. 바로 야마모토 리켄과 판교 하우징 이야기다.
판교 하우징은 모든 주택이 현관으로 통하는 2층의 공유 테라스를 가지고 있으며, 마주 보고 있는 각 세대 현관은 사방이 유리 벽인 현관홀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공동주택 설계 때 이웃 간 프라이버시 확보라는 공식과도 같은 명제를 깨트렸다. 이런 연유로 산운마을 최초로 미분양 사태를 초래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세대 간 공동체가 결속되는 반전의 결과가 나타났다. 거주자들은 투명한 현관홀을 응접실로 쓰고, 개방된 창을 통해 이웃과 인사하며 지내고 있었다. 자연 환기와 시간에 따른 볕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공동주택이 된 것이다. 공간이 거주자의 삶을 바꾼 셈이다.
현재의 ‘1가구 1주택’ 모델의 수정, 이는 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새로운 주거 모델을 요구한다. 미래 주택에 대한 새로운 상황 인식과 건축가로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곳이 판교 하우징이다. 주택문제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고,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공간에 반영됐다.
산술적으로는 주택보급률 100% 초과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내 집’을 꿈꾸는 동안 대다수 주택은 밀실이 되었고, 주변 환경은 피폐해졌으며, 지역 커뮤니티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건축은 사람을 연결해야 한다. 단순히 사생활을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라 주민들이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 건축 개념을 선보인 야마모토 리켄이 이 시대에 주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2024-03-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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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삶의 표준 제시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한스 샤로운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건축가를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설렘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Die Weissenhofsiedlung)’를 한걸음에 달려갔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지금으로부터 97년 전인 1927년 독일공작연맹과 슈트트가르트시 지원으로 건설됐다. 독일공작연맹은 예술, 건축, 산업 간 통합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단체였다. 이 단체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심각한 주택문제에 관심을 두고 새로운 건축 재료와 기술을 활용한 실험적인 주거단지 개발을 추진한다. 여기에 당시 30, 40대의 젊은 건축가 17명이 대거 참여하는데, 훗날 이들은 20세기 현대건축의 거장이라는 반열에 서게 된다.
20세기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인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새로운 건축 재료와 기술을 통해 변화하는 근대 건축의 모습을 5가지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 5가지 원칙인 필로티, 옥상정원, 수평 연속창, 자유로운 입면(파사드), 자유로운 평면은 바이센호프 내 르 코르뷔지에 주택에서도 구현됐다. 현재 이 주택은 전체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1927년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Less is More(적을수록 풍요롭다)”라는 명언을 남긴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이센호프 계획과 건설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24세대가 거주하는 4층 규모 공동주택을 디자인했다. 장식을 최소화했기에 “Less is Bore(적을수록 지루하다)”라는 말로 비난도 받았지만, 기능적이면서 경제적이고, 또한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어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다.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 필하모니 콘서트홀을 만든 건축가이다. 기능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설계된, 최초의 빈야드 형태의 콘서트홀로 공연장 건축의 새로운 원형을 제시했다. 바이센호프 건축 때도 건축물에 필요한 기능을 자연스레 도면에 표현했다. 거주자의 생활방식, 공간 이용 패턴, 부지 위치와 특성을 고려해 주택 각 공간의 형태를 결정했다.
바이센호프 프로젝트로 지은 총 33채의 주택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돼 현재는 11채만 남아 있다.
거장들이 설계한 주택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하지만 지금의 눈높이로 평범해 보이는 공간과 기능은 당시는 새로운 시도였고, 현재까지도 유효한 방식이라는 점은 놀라웠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개막식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설계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바이센호프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들의 고민과 정신을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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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백색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솔올미술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들이 만든 공간이 국내에도 제법 만들어졌고, 계획 중인 프로젝트도 다수 있다. 초기에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정도가 제주도를 시작으로 몇 곳 선보이는 수준이었지만, 근래에는 제법 많은 건축가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도드라지는 분야가 미술관과 박물관과 같은 전시 공간이다.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유민미술관·본태박물관을 시작으로 장 누벨의 삼성미술관 리움, 렘 콜하스의 서울대 미술관, 알바로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헤르조그 & 드 뮈롱의 송은 아트스페이스 등이 해당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스타 건축가이자 프리츠커 수상자인 리차드 마이어에 의해 지난 14일 강릉 솔올미술관이 개관했다.
리차드 마이어의 주요 작품 역시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미국 애틀랜타에 위치한 하이 뮤지엄과 로스엔젤레스의 게티 센터가 있다. 유럽에는 독일 바덴바덴의 프리더부르다 미술관과 프랑크푸르트 장식미술관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현대미술관이 잘 알려져 있다.
건축계에서는 그를 ‘백색의 건축가’로 부른다. 건축물 외관을 백색으로 하고 자연광과 주변 경관을 최대한 활용한다. 백색 건축은 주변 모든 색깔의 빛을 담아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이 공간과 건축물에 투영되도록 한다. 리차드 마이어의 ‘시그니처’이다.
지난 주말 솔올미술관을 찾았다. 현대미술의 아이콘인 루치오 폰타나의 개관 전시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미술관 건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만했다. 리차드 마이어는 2018년 ‘미투’ 운동 당시 불명예스럽게 은퇴했지만, 그가 만든 회사 마이어 파트너스와 그의 철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면 일체의 조명이 불필요할 만큼 자연광이 내부 공간 깊숙이 들어왔다. 자칫 차가울 법한 백색 마감에 온기가 더해진다. 3개의 전시실은 높은 층고의 큐브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공간을 잇는 수평, 수직 동선의 외부는 큰 유리창으로 되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외부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솔올미술관은 미술과 건축이 분리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콘셉트로 계획되었고, 미술, 자연, 사람이 함께하는 개방된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이 솔올미술관 개관과 초기 운영을 맡고 있는데, 그 첫 프로젝트로 ‘루치오 폰타나:공간·기다림’과 ‘In Dialog:곽인식’ 두 개의 개관 전시를 오는 4월 14일까지 선보인다. 이는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함께 조명한다는 솔올미술관의 비전이기도 하다. 강릉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지 기대된다.
2024-02-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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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네바다 사막에서 만난 공공예술, 세븐 매직 마운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5번 고속도로를 따라 라스베이거스 남쪽으로 가는 길에 마주한 ‘세븐 매직 마운틴(Seven Magic Mountains)’의 특별함은 잊을 수가 없다. 네바다 사막의 고요함 한가운데 다채롭게 쌓인 7개 타워 형태의 바위는 낯선 풍경을 통과하는 여행자들의 길을 표시하는 돌무덤이 연상된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천연색과 형광색으로 칠한 높이 9m가 넘는 거대한 돌탑의 유니크함과 크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네바다주와 인접해 있는 유타주 브라이스 캐니언의 침식형 자연 암석 첨탑을 모티브로 했다.
공공예술은 작품이 위치한 장소의 정체성을 재정의한다. 우고 론디노네가 만든 세븐 매직 마운틴이 대표적이다. 론디노네는 방문객이 사막이라는 공간과 인간의 개입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네바다주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예술 도시로서 라스베이거스를 주목하게 한다.
세븐 매직 마운틴은 공공예술이면서 ‘대지예술(Land Art)’이다. 동시에 ‘사이트 스페시픽 아트(Site Specific Art·장소 특정적 미술)’이다. 어디에나 설치할 수 있지만, 작가는 라스베이거스 인근 네바다 사막에 설치했고, 형형색색의 돌탑은 화려한 조명으로 덥힌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번화가의 카지노 호텔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라스베이거스와 네바다주의 문화 발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역·공공·민간 파트너십으로 지난 2016년 5월 만들어졌다. 라스베이거스의 아리아 리조트 & 카지노 호텔, 미국 의류 브랜드인 바나나 리퍼블릭, 네바다주 관광교통국 등이 메인 스폰서 역할을 했으며 론디노네의 전속화랑 격인 글래드스톤이 네바다주 미술관과 협업해서 탄생했다. 위치가 사막 한가운데다 보니 공공기관과 협상, 허가 절차, 탐색, 설치 공정별 엔지니어링, 그리고 토목공사까지 준비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처음 계획은 2년 동안 전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성공으로 인해, 작가는 현재 위치에서 작품을 계속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명했고 현재까지도 무기한 전시 중이다.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사진, 건축,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 작가 론디노네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다.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야외에 있는 리버풀 마운틴도 같은 예이다. 세븐 매직 마운틴과 유사한 작업이었는데, 테이트 리버풀 30주년을 기념하는 야외 조각이자 론디노네의 영국 최초 공공 예술작품이었다. 국내에는 2022년 국제갤러리 서울 K3에서 소개된 바 있고, 부산에도 수영구 망미동 F1963 야외 소리길 끝자락에 론디노네 작품 한 점이 있기도 하다.
2024-02-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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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태양의서커스' 상설공연, 부산 론칭 즐거운 상상
‘태양의서커스 루치아’ 투어 공연이 지난 13일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내 빅탑에서 개막했다. 이 프로덕션의 오랜 팬인 나로서는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루치아’는 지난 2019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만난 바 있지만, 역사적인 부산 첫 공연의 감동을 함께하기 위해서 찾았다.
여행과 공연이라는 콘셉트로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공연하는 태양의서커스는 투어 공연과 레지던트 공연으로 구분된다. 투어 공연은 다시 아레나 공연으로 나뉘는데 흔한 경우는 아니다. 전 세계 17개 도시에서 23편의 태양의서커스 쇼를 만났지만,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델리리움’, 독일 쾰른 랑세스 아레나에서 ‘토룩’ 두 편밖에 만나지 못했다.
레지던트 공연은 대부분 라스베이거스 전용 극장에서 공연되는데 벨라지오 호텔의 ‘오 쇼(O show)’와 MGM 그랜드 호텔의 ‘카 쇼(Ka show)가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가 연출한 ‘카 쇼’의 경우는 극장과 무대 건설 비용으로 미화 2억 2000만 달러(한화 약 3000억 원)이 들었는데, 2005년 개막했으니 20년 전 환율로 따지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제드’와 마카오 베네시안 리조트에서 ‘자이아’ 공연이 상설 무대로 꽤 오랜 기간 공연된 바 있지만, 현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6개의 공연과 올란도 디즈니월드, 그리고 멕시코 유카탄주 플라야 델 카르멘의 리조트에서 펼쳐지는 ‘호야(Joya)’가 있다.
필자는 비단타 리비에라 마야 리조트가 개관하던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 ‘호야’를 만났다.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초호화 호텔에 위치한 다른 레지던트 공연과 달리 밀림 한가운데 조성된 전용 극장은 마치 마야문명으로 여행하는 판타지를 공연뿐 아니라 공연장 입장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건 요리와 공연예술을 결합해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관광과 문화, 쇼 비즈니스와 식도락까지 그야말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극치를 만들어냈다.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한 부산이 지난해 3분기에만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리고 330만이라는 부산 내수 인구도 있다. 인접 도시 울산, 창원, 김해를 포함해 경남까지 합치면 동남권은 700만 명이 넘는다. 당장에 미국이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멕시코에서도 가능했던 일이다. 가까운 미래에 태양의서커스 레지던트 공연이 부산에서 론칭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해양도시 미래도시 부산을 콘셉트로 만든 작품이다. 장소는 기장이 되어도 좋고 북항이 되어도 좋다. 시그니처 문화공간은 하드웨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24-01-2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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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독일 바덴바덴 '프리더 부르다'에서 만나는 니콜라스 파티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기대와 달리 지난해 11월 파리에서의 낭보는 들리지 않았다. 40년 전 독일의 온천 도시 바덴바덴(Baden-baden)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과 10개월 유치 활동 끝에 경쟁 도시였던 나고야를 물리치고, 이끌어낸 88 서울올림픽과 같은 반전 드라마는 없었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은 우리에게는 이렇게 기억되는 도시이다.
바덴(Baden)이라는 말 자체가 ‘온천’이라는 의미의 독일어로 바덴바덴은 ‘바덴주의 바덴’이라는 뜻이다. 독일 슈바르츠발트 산지 북서쪽 기슭에 위치한 이곳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온천으로 알려져 수많은 중세 시대의 유적지가 있는 휴양 도시이자 세계 최초의 카지노가 생긴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바덴바덴은 더 이상 온천 도시나 도박을 즐기는 레저 도시가 아니라 유럽 최고의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했다. 그 시작은 1988년 개관한 2500석 규모로 독일 최대의 축제극장(Baden-baden Festspielhaus)이다. 오래된 기차역이 축제극장으로 탈바꿈했는데, 유럽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공연이 시즌마다 올라가고 있다. 2004년부터는 프리더 부르다(Frieder Burda)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독일 서남부 아니 전 유럽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관으로 우뚝 섰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리차드 마이어의 대표작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근에 온천 도시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도시가 쇠락할 무렵 바덴바덴은 문화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다.
출판과 인쇄업으로 성공한 프리더 부르다는 1968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루치오 폰타나의 빨간색 절단 그림을 시작으로 그만의 컬렉션을 만들면서 미술품 수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이 있는 프랑스 무쟁(Mougins) 근교에 세울 계획이었으나, 계획을 바꾸어 바덴바덴에 미술관을 열게 되었다. 건축비만 2000만 유로(당시 환율로 약 300억)가 소요됐으며, 피카소의 후기 걸작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 시그마 폴케 등 독일의 전후 예술가들 주요 소장품이 포함됐다. 이어서 막스 베크만, 게오르그 바젤리츠까지 700여 점의 컬렉션으로 확장했다.
지난해 11월 4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프리더 부르다에서는 현대 미술계의 슈퍼스타인 니콜라스 파티의 ‘내일이 오면(When Tomorrow Comes)’ 전시가 열리고 있다. 파티는 공원 풍경 한가운데 위치한 미술관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인식해 액자 프레임이 아닌 건축물의 흰 벽에 직접 그림으로써 건물과 작품이 하나의 무대처럼 인식되게 만들었다. 이를 위해 작가는 한 달간 미술관에 머물면서 벽면에 벽화를 그리듯 체류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니콜라스 파티 개인전은 오는 9월 호암미술관에서 국내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다.
2024-01-11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