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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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성 수필가

아내와 함께했던 그 순간들은 잡아 둘 수가 없는,
그리고 너무 아리고 아파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였다.
내가 찾은 것은 더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둠이 내려오자, 갑자기 어떤 따스함 -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기다리는 따뜻한 집이 생각나듯 - 그런 따스함이 그리워졌다.

따뜻한 아내의 미소가 떠오르자, 아내와 같이 명절 때마다 다녀갔던 아내의 친정집이 생각났다. 처가가 생각난 것은 아마, 이제는 아내가 기다리는 집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 되어, 뼈저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명절 때면, 나는 시골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안사람들의 방문이 끝날 때쯤에야 아내의 친정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오후 늦게야 아내의 친정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큰 처남과 작은 처남, 그리고 아내의 삼촌까지도 모두 가족들을 데리고 와 있었으므로, 처가 집의 명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모님이 뛰어나와 반기고, 장인어른은 얼른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밤늦도록 지난 세월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아래채 할아버지 방을 차지했다. 그런 기억은 나를 항상 따뜻하게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장모님, 그리고 장인어른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아내의 친정집은 빈집이 되어, 버려져 있었다.

아내의 웃음과 처가 가족들의 따스한 눈길과 반가운 인사가 있던 곳, 온 가족들이 다 함께 있던 곳, 그때가 가슴 저릴 만큼 그리워졌다. 나는 차를 아내의 친정집이 있는 마을로 몰았다. 아내와 명절의 들뜸으로 가던 길, 정다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러 간다는 즐거움에 설레던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빈집이며, 이제 나는 혼자였다. 그래도 나는 그 집이 보고 싶었고, 그 집은 외로울 때면 와서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낯익은 굽이를 하나 둘 지날 때마다, 그 세월의 기억들이 하나둘 정답게 다가왔다. 아내의 친정집 마을은 희미한 달빛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거대한 정자나무 그림자가 나와 차를 덮었다.

나는 폐가가 된 처가의 대문을 열고 마당에 섰다. 처연하게 달빛을 담고선 폐가가 나를 맞았고, 괴괴한 고요가 흘렀다. 아무것도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없었다. “자네 왔는가!” 반기던 처가 식구 누구도 없었다. 그 따뜻한 세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하얀 달빛 속에서 내 그림자를 밟으며 할 일 없이 마당을 서성거렸다.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 주던 그 사람들을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내가 투병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아내가 뛰어놀았을 처가 동리의 들과 개울을 생각했다. 아직 어린 아내가 산과 개울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아마, 아내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투병하는 아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햇살에 까맣게 그을려 개울에서 뛰어노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내 허전하고 허기진 마음이 찾은 것은, 내 마음이 빌 때마다 나를 불러 세우는 아내와 함께했던 그 기억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내가 붙잡아 둘 수 있는 그 정다움의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섰지만, 내가 붙잡아 둘 정다운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와 함께했던 그 순간들은, 붙잡아 두고 싶어도 잡아 둘 수가 없는, 그리고 너무 아리고 아파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였다. 내가 찾은 것은, 아니 달빛에 젖은 나를 찾아온 것은, 더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다.

볼이 젖고 있는 것을 알고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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